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복궁 비현각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1463년([[세조(조선)|세조]] 9년)에 [[경복궁 사정전|사정전]] 동쪽 모퉁이의 내상고 2칸을 ‘비현합(丕顯閤)’이라 이름 지은 것이 비현각 역사의 시작이다.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ga_10911008_001|#]]. [[조선시대|조선 초기]]에는 [[왕]]의 별당이었다.[* [[경연]]을 하거나 [[신하]]를 밤에 따로 불러 만나고, 이외에도 [[잔치]]나 [[국문]] 등 다양한 활동을 했던 곳이다.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ga_10911015_001|#]]] [[명종(조선)|명종]] 시기 이후로 ‘비현각(丕顯閣)’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. 1592년([[선조(조선)|선조]] 25년) [[임진왜란]] 때 [[경복궁]]의 다른 [[건물]]들과 함께 불 타 없어지고 270년 간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가 1866년(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 3년)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다. 이 때 이름도 정식으로 비현각이 되고, [[동궁]]에 속해져 [[왕세자]]의 [[공부방]] 겸 [[사무실]]로 바뀌었다. [[일제강점기]]인 1915년에 ‘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’를 [[경복궁]]에서 열면서 헐렸다. 건물은 어느 [[일본인]]에게 팔려가 당시 [[경성부]] 니시오켄마치(西四軒町)[* 현재의 [[서울특별시]] [[중구(서울)|중구]] 장충동.]로 옮겨져 [[별장]] '남산장(南山莊)'으로 변모했다. 옮긴 이후 어떻게 되었는 지는 알 수 없으며, 지금 [[건물]]은 1999년 12월에 [[복원]]한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